From tear-drenched pillow to gateway to peace, or

Potential of art cultivating the heart’s miracle


Sim Sang-Yong (Art history PhD, Art critic)



Hyemin Lee’s world points to a fundamental place in art, a profound place of existence where our minds stir and emotions waver, a place that has long been disregarded. This is the world that has been viewed as overly “psychological, subjective and suspicious” through the bias of avant-garde scientism. Yes. The symbols, marks, orthography and sentences that compose this world are not irrelevant to the nights the author has spent drenching her pillow with tears.


Aesthetics has an interesting character related to the awareness of beauty in that it is inherently linked to experiences of desperation or agony. To borrow Howard Guinness’s appropriate expression, the stemming of “one process from one crisis” is an undisputed order of life. The moment one becomes aware of the complete helplessness that forbids intervention by one’s will, the gateway towards beauty opens. This may be paradoxical, but not untrue. It is a “spiritual truth” that the moment the will is disallowed from intervening is the moment towards eternity, or a “moment of Utopia.” It is also a process of human enhancement and a process towards understanding freedom and liberation.


Actualization of beauty finally becomes art after facing the absurdity of life and enduring times of agony, as it is impossible to reach the essence of life without experiencing the pain of existence. Only tempered life permits one to reach its “unique profundity.” This is the reason why while life is afforded to everyone, not every life accomplishes the same thing. We may heed Os Guinness’s words on this topic:


“When comfort and convenience deplete our energy and idealism, idleness permeates our minds like poison in our blood. Consequently, lethargy, ennui and futility take over our mind and we slowly submit to the temptation to subordinate our ideals.”


However, let us be on guard against the empty rhetoric of romanticism. Without a cure, tears cease to be beautiful! If Lee had not embarked on the road to recovery and instead dwelt on painful memories, her story would have remained distant from the warmth of life, even if the tear-drenched pillows were exquisitely colored. Instead, when plastered bandage, used for wrapping wounds and thus symbolizing the weakness of existence, transforms into pure white lace for the bride, this world becomes a platform of aesthetic sublimation that speaks for the once-forgotten elasticity of life. Surprisingly, plastered bandage doesn’t bring back the fractured memories endured by the artist, due to her skill of extracting consolation and purification of the mind from the poverty of discarded fabric and tear-drenched pillows.


As such, Lee modifies memories and renews meaning through commonplace materials, simple tailoring and earnest sewing, as if reiterating Reinhold Niebuhr’s prayer: “Help me accept adversity as the path to peace.” This is the metamorphosis that the artist speaks of, the modification of meaning towards purification. This is not something that can only happen through meditation in a monastery. Though it may lack the momentary analgesic effect of placebo or self-hypnosis, art has a potential for cure and recovery. To this end, we must ponder upon the steps Lee took, starting with her life that features her wounded heart and willingly passing by a painful place in her memory.



Lee’s pillow is a symbolic place which explicitly shows that life is filled with a paradoxical mystery that converts a tearful past to a gateway to peace. As shown in her works entitled “Pillows,” dozens of pillows composed of small pastel-toned fabrics eventually bloom into a single flower. The cultivation of a heart’s miracle has taken place inside of this “memory repository of textiles.” Cheap and commonplace materials are rapidly and fully elevated to a warm and animated existence. Such transformation, a salvation of matter and sublimation of heart, is truly a Kairos-like and fiercely aesthetic incident. This aesthetic proclaims that “there is no such thing as a trivial moment in everyday life.” The basis of this aesthetic is the possibility of solving the mystery of life and witnessing its furtive clues even during its struggles.


Like Raymond Williams’s saying that “culture is a whole way of life,” art also shares the same basis. Though art should not be assimilated or reduced to everyday life, art that entirely surpasses or is unrelated to life is neither art nor meaningful. As expressed by Aimé Fernand Césaire, art without connection to “writing books or building houses, the way we dress, the way we carry our heads, the way we walk” is futile. From the context of Kairos, the mysterious potential of salvation is embedded in all corners of life. As moments of truth flash during the most banal circumstances, people will discover and recover themselves through small moments of their lives within this aesthetic.


This reasoning is the most prominent way of overcoming the dogma of modern aesthetic that dominated the past century. The path pursued by the dogmatism of modern aesthetic resulted in the burial of the contemporary. Within the denial of past and future, only the present was defined as a period worthy of concentration. However, such contemporaneity is only a sequential flow of Kronos’s time, which has resulted in the separation from Kairos’s time, “a time full of opportunity, a moment conceived with eternal meaning and potential.”


It is always a spectacle to see how a “warm rebellion” spreads through the alignment of Lee’s pillows, cut and reborn into five colors, hovering the floor and rising vertically, flowing through space and crossing it horizontally, transforming a cold and neutral white cube into the redemptive space of Kairos. It is especially so when the five-colored and pastel-toned pillows that harbor remembered tears and finally attained peace seem to delightfully create a new path through the barren art of a heartless era. 




눈물 젖은 베개에서 평화의 관문으로,

또는 마음의 기적을 경작하는 예술의 가능성


심상용(미술사학 박사/미술평론)




이혜민의 세계는 예술의 한 근원적인 자리, 오랫동안 덜 중요한 것처럼 취급되었던 그것, 곧 마음이 동요하고 감정이 출렁이는 존재의 깊은 곳을 가리킨다. 이 세계는 아방가르드 과학주의의 주도적인 편파 아래 지나치게 ‘심리주의적이고 주관적이며 수상쩍은’ 것으로 간주되어 온 바로 그 세계다. 그렇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상징과 기호, 철자법과 문장은 작가 자신의 베개 속까지 눈물로 적셔야 했던 지난날의 밤들과 무관하지 않다.

미(美), 곧 아름다움의 인식과 관한 한 흥미로운 특성이 있는데, 어떤 식으로든 인생의 절박했거나 고통스러웠던 경험과 내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워드 기니스(Howard Guiness)의 적절한 표현을 빌자면, ‘하나의 위기로부터 하나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 예외 없는 삶의 질서다. 의지가 개입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철저한 무기력이 자각되는 바로 그 순간, 아름다움을 향한 가능성의 관문이 열리는 것이다. 이는 역설이지만 거짓은 결코 아니다. 의지의 개입이 허용되는 않는 순간이 영원으로 나아가는 순간, 곧 ‘유토피아의 순간(moment of Utopia)'이 된다는 이것이야말로 ‘영적 진실’로, 모든 인간적 향상이 밟는 절차이자 자유와 해방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아름다움의 수행은 인생의 부조리를 경험하고 고통의 시간을 견디면서 비로소 예술이 된다. 실존의 통증이라는 계기 없이 삶의 본연에 다가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단(鍊鍛)된 삶만이 그 자체의 ‘고유한 깊음’에 이르도록 허락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삶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기회지만, 모든 삶이 동일한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닌 까닭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오스 기니스(Os Guinness)의 첨언이 귀담아 들을 만하다.


“안락함과 편리함이 우리의 에너지와 이상주의를 고갈시키게 되면, 무위의 나태함이 피 속의 독처럼 우리 마음속으로 침투한다. 그렇게 되면 무기력증, 싫증, 허무함이 우리의 마음을 압도하면서 우리는 서서히 우리의 이상을 낮추려는 유혹에 굴복한다.”


하지만, 낭만주의의 속이 텅 빈 수사를 경계하자. 치유가 없다면 눈물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상처의 기억을 곱씹는 대신 치유와 회복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설사 눈물의 베개를 오색의 아름다움으로 옷 입혔다 할지라도, 이 이야기는 따듯한 생의 감각에는 많이 못 미치는 것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존재의 약함을 표상하는, 상처를 싸매는 용도의 석고붕대가 신부(新婦)를 위한 순백의 레이스가 될 때, 이 세계는 망각되었던 생의 탄력을 대변하는 미적 승화의 장이 된다. 놀랍게도 석고붕대는 더 이상 작가가 겪었던 골절의 기억조차 호출하지 않는다. 눈물 젖은 베개와 버려진 천 조각들의 가난함에서 마음의 위안과 정화의 느낌을 추출해내는 기술 덕일 터이다.

이렇듯, 가난한 질료와 소박한 재단, 정성이 깃든 바느질로, 이혜민은 사물의 기억을 조정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한다. 마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고난은 평화에 이르는 길임을 받아들이게 하여 주소서.”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탈바꿈(Metamorphosis)', 곧 정화를 향한 의미의 변이인 것이다. 이것은 명상의 수도원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위약효과나 자기최면 같은 것으로부터 오는 일시적인 진통효과가 아니더라도, 예술은 치유와 회복의 지적적인 잠재력을 발휘 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혜민이 걸어왔던 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생활의 경험에서 출발하고, 상처가 있는 마음에서 시작하고, 기억의 아픈 자리를 기꺼이 경유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혜민의 베개는 이제 눈물어린 과거가 평화의 관문으로 화하는, 삶이 역설적 신비로 가득한 곳이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장소다. <pillow>라는 제목의 작품들에서 보듯, 작은 파스텔 톤의 조각 천으로 만든 수십 개 베개들의 조합이 이윽고 한 송이의 꽃을 피워낸다. 이 “텍스타일 재질의 기억 저장고”에서 일어난 사건은 마음의 기적을 경작하는 바로 그것이다. 흔하고 값싼 일상의 소재들로도 따듯하고 밝은 생명체로의 비약적인 격상이 충분히 성취된다. 사물의 구원이자 마음의 승화인 이 탈바꿈이야말로 진정으로 ‘카이로스(Kairos)’적이고 치열하게 미학적인 사건이다. ‘일상의 사소한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미학의 선언이다. 삶의 힘겨운 순간들에서조차 인생의 신비를 풀고 해석할 은밀한 단서를 목격하는 것의 가능성이 이 미학의 근간이다.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말처럼 ‘문화는 곧 일상’이며, 예술도 그와 동일한 기반을 공유한다. 예술이 일상으로 동화되거나 축소되어선 안 되겠지만, 일상을 전적으로 넘어서거나 일상과 무관한 것은 예술이 아니거나 최소한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에메 세제르(Amme Fernand Cesaire)의 표현대로 “책을 쓰거나 집을 짓는 것, 옷을 입는 방식, 고개를 드는 방식, 걷는 방식”과의 접촉이 없는 예술은 공허하다. 카이로스의 맥락에서 볼 때, 생활의 모든 단면들에 구원의 신비로운 잠재성이 내재해 있다. 가장 일상적인 상황이 가장 진리의 순간이 번뜩이는 계기이기에, 이 미학 안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활의 작은 순간들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고 회복하게 될 것이다.

이 사유야말로 지난 세기를 주도했던 모더니즘 미학의 도그마를 극복하는 가장 유력한 길이다. 모더니즘 미학의 독단이 촉구한 노선은 동시대에의 매몰로 귀결되었다. 과거와 미래의 부정 속에서, 오로지 현재만을 집중해야 할 가치가 있는 시간대로 규정했다. 하지만, 그 동시대성은 단지 순차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Kronos)’의 시간일 뿐인 것으로, 이로 인해 미학이 ‘카이로스(kairos)의 시간, 곧 “기회로 가득한 시간이며, 영원한 의미와 가능성을 잉태한 순간”으로서의 시간과 결별하게 된 것이다.

오색으로 재단되고 새롭게 태어난 이혜민의 베개들이 일렬로 이어지면서, 바닥을 맴돌다 수직으로 상승하기도 하고, 공간을 타고 흐르거나 종횡으로 가로 지르기도 하면서, 화이트큐브라는 차갑고 중성적인 공간을 카이로스적 치유의 공간으로 뒤바꿔놓는, 그 ‘따듯한 불온’이 뻗어나가는 광경은 언제 보아도 인상적이다. 기억된 눈물과 비로소 성취된 평화를 품은 오방색과 파스텔 톤의 베개들이 이토록 무정(無情)한 시대의 메마른 예술을 통쾌하게 지나쳐 새로운 길을 내는 것처럼 보일 때 특히 그렇다.



이유진갤러리는 8월 13일부터 9월 2일까지 이혜민 작가의 개인전 <A Thousand water drops>을 개최한다.

이혜민 작가는 오래된 조각 천으로 만든 작은 베개 수십 개를 연결하거나 쌓은 평면 작업이나 이런 베개를 브론즈로 캐스팅한 조각, 또는 석고 붕대에 물을 적셔 굳힌 작업 등을 통해 작가로서 삶에 대한 태도와 은유를 담아낸다.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수적천석(水滴穿石)의 말처럼 작가는 손바느질로 하나 하나 엮어내는 인고의 작업 과정을 거쳐 제작한 신작 포함 사십 여 점의 작품들을 공간에 채워냈다. 천이나 솜 같은 부드러운 재료가 스펙타클한 입체 설치를 이루거나 단단한 청동과 대리석 같은 소재로 강인함을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 변모되기까지 소재의 역설은 외유내강을 꿈꾸었던 작가의 삶의 기억과 내면세계의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이혜민 작가는 이른 결혼과 육아를 겪으며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역할과 작가로서의 삶, 그리고 한 때 불의의 사고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시기까지 작업 전반에 걸쳐 사적인 역사의 간극을 오가는 메타포가 작업의 주된 주제로 해석된다.


작가 이혜민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영은미술관, 갤러리로얄, Art Mora, Washington Square Gallery 등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19회의 개인전 및 수 차례의 그룹전을 가졌다.